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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3 탕자시대 -가치관- (눅 15:11,12)
작성일 :  2021-06-14 09:55
이름 :  admin E-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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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인은 사람의 사람 된 가치를 평가할 때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돈이라고 하는 새로운 측정기를 사용함으로 돈에 의하여 사람의 가치관이 좌우되는 것으로 전락 되어가는 현상입니다. 여기에 현대인은 강철과 새로운 석기(石器=반도체) 시대를 탄생시켜 벅찬 고역으로 그 고귀한 인간성을 송두리째 강탈당하고 있는 현상을 빚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생의 가치관에 대한 큰 오류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가치관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 사회에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들려주신 이 위대한 탕자 비유에서도 탕자가 가졌던 잘못된 인생의 가치관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 비유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는 모든 인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가리킴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께로부터 유래된 한 형제요 한 족속입니다(2:10,17:26). 두 아들의 넓은 의미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상태는 실로 평화롭고 만족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둘째 아들의 잘못된 가치관으로 말미암은 불행한 양상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둘째 아들의 소행을 가리켜 탕자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적인 사회를 탕자시대, 혹은 탕자의 세계 혹은 탕자 문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탕자시대의 가치관은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가치의 척도를 자기에게 두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그 둘째 아들은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얼핏 볼 때 둘째 아들의 요구는 정당한 권리인 것 같습니다(21:17). 그러나 이 둘째 아들의 요구는 자기라고 하는 것에 기준하고 움직인 사실입니다.

  一. 가치의 척도를 자기(자율주의)에서 출발했습니다.

  그의 가치관의 척도는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와 그 분깃의 존재 근원은 아버지입니다. 그의 존재 시발의 아버지요 그 존재 자체의 의의가 아버지께 있습니다. 그 분깃은 본래 자기 것이 아닌 아버지의 것입니다(1:21). 그러므로 분깃보다 아버지가 먼저입니다. 아버지가 있고 분깃이 그 다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분깃보다 우선적이요 시간적으로나 가치로 볼 때도 우선적입니다. 그러나 이 둘째 아들은 내게라고 함으로 그 사고방식을 자기로부터 출발시키고 있습니다. 탕자시대의 특징은 절대자가 선행되지 아니함에 있습니다. 아버지(하나님)가 전제되지 않는 아들만의 절대가 바로 탕자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 현상이 곧 마음에 하나님 두기 싫어하는 그것입니다(1:28-32).

  二. 가치의 척도를 분깃(물질) 그 자체에 두었습니다.

  이러한 가치관은 자녀의 신분을 버린 데서 기인된 것입니다.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보다 돈을 우선적인 지위에 놓았습니다. 이는 행복의 표준을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고상한 윤리적 입장이나 정신적인 차원에서 찾지 않고 오직 외부적 조건에서 찾았습니다. 에덴의 비극이 외부적인 조건의 결핍에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담과 하와가 소유한 외부적인 조건은 만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인격 곧 마음에서 하나님 말씀의 지배에서 떠났을 때 캄캄했습니다. 공허 속에서 두려워했고 도망쳤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현대 탕자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이 모든 행복의 조건을 유물주의에서 찾아보려는 노력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은 새로운 경제정책, 교육제도, 사회제도 등 모든 정책 수립을 전혀 외부 환경조건에다 인간의 행복기준을 두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탕자시대, 탕자문명이 내걸고 있는 잘못된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한 것은 생활수준이 높은 나라일수록 국민 자살률이 높게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볼 때에 인간의 근본적인 불행이 결코 외부 환경적 조건의 부족함에서가 아니라 차라리 인간의 근본 불행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은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5:16)고 못 박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문의 둘째 아들의 의지는 돈입니다. 그의 감정도, 힘도, 꿈도 모두가 돈이었습니다. 그 마음의 지배자는 아버지가 아니라 돈입니다. 그러나 분깃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분깃 자체는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하는 고귀한 관계에서 비교할 수 없이 낮은 가치입니다.

  三. 그는 아버지 밖에서 자유하고 싶어한 자만자였습니다.

  그는 물질 뿐 아니라 선()의 척도를 자기에게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척도를 아버지에게 두는 것을 의심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자체가 의심이 났습니다. 절대 의존할 마음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곧 아버지의 말씀보다 마귀의 말이 들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졌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의 관리가 마땅치 않았고 아버지의 보호가 싫어졌습니다. 아버지 없는데서 그 자신 스스로 아버지 노릇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자기 분깃을 달라고 권리행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올 분깃은 물질 그것이 아니라 아버지 그 자체인 것을 아들은 몰랐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기 속에 생긴 교만과 자만이 아버지를 떠나 머나먼 곳으로 자행자지(自行自止)하는 길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탕자시대의 가치관은 잘못되었습니다. 어떤 물건에 가치를 부여코자 할 때 그것은 사실상 제한적이요 유한적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에 도무지 가치측정을 할 수 없는 것이 될 때 그것은 분명 이 세상 이상의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가치 척도를 어디에 두느냐 그것은 아버지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그분은 시작도, 끝도 없으신 영원자존자이십니다. 우리는 감사하옵게도 그분의 소생들입니다. 이는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정도의 것입니다. 가치 측정 이상인 하나님 소생인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은 분명히 외적인 분깃 자체론 계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경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그리하면 그 모든 것(영육에 필요한 것)을 더하시리라(6:33)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생에게 돌아올 분깃, 그것은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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